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징웨이 공작 (문단 편집) === 메이쓰핑의 방일과 우한 함락 === 가오쭝우의 방일로 왕징웨이와 일본이 협상해야 한다는 데에 어느 정도 합의를 보게 된 화평파들은 본격적으로 일본과 교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오쭝우의 경우에는 장제스의 질책을 받고 그의 의심을 사게 되자 입법위원이자 저조구락부 멤버인 메이쓰핑이 대신 나섰다. 장제스의 가오쭝우 질책이 있은 후 저우포하이가 가오쭝우에게 연락해서 한동안 충칭에 오지 말도록 연락하는 한편 홍콩에서 대일 정보 확보 임무를 맡을 새 임무로 메이쓰핑을 추천했는데 이로 인하여 8월 29일부터 9월 4일까지 홍콩에서 메이쓰핑과 마쓰모토 시게하루가 5차례에 걸쳐 협상하였다. 일본측은 왕징웨이의 충칭 이탈, 신정부 수립, 일본과의 화평협상 추진을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에 메이쓰핑은 왕징웨이가 중심이 되어 대일 화평을 주도한다는 방침에 동의했다. 그리고 만약 왕징웨이가 일본과 본격적으로 협상에 나선다면 [[룽윈]], [[장파쿠이]]같은 반장 군벌들이 이에 가세할 것이라고 하였다. 왕징웨이도 1938년 10월 11일 독일 통신사 기자와 담화를 나누면서 항전과 동시에 제3국을 통한 평화협상의 문을 닫은 것이 전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일본에게 중국의 국가적 생존과 독립을 저해하지 말 것을 주문했고 10월 21일 로이터통신 기자와의 인터뷰에선 일본이 중국의 생존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평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서 일본과의 평화 가능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원론적인 가능성을 열어두는 정도가 아니라 메이쓰핑과 마쓰모토의 합의를 바탕으로 왕징웨이가 실질적인 행동을 암시한 인터뷰로 볼 수도 있다. 왕징웨이의 이러한 발언은 공산당과 [[천청]]을 중심으로 한 국민당 항전파들의 비판을 받았다. 10월 22일 충칭으로 간 메이쓰핑은 왕징웨이에게 일본이 제시한 조건들을 전달했다. 메이쓰핑은 왕징웨이에게 "일본은 왕징웨이가 충칭을 이탈하여 별도의 정부를 조직해 평화조건의 담팜을 지울 것을 희망하고 있다."라고 하였고 왕징웨이의 집에서 [[천궁보]], [[메이쓰핑]], [[저우포하이]][* 저우포하이는 우한에 있다가 10월 22일 광저우 함락으로 인해 충칭으로 철수했다.], [[타오시성]], [[천비쥔]][* 왕징웨이의 아내.] 등이 모여 비밀회의를 계속했다. 그러던 중 25일과 27일에 걸쳐 우한이 함락되었고 일본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졌으며 화평파를 매국노 취급하는 강경파의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졌다. 반면 중국의 화평파는 나라의 장래가 암담하다면서 중국의 희망에 더 이상의 기대를 걸지 못하고 있었다. 화평파 인사들의 회의는 메이쓰핑이 다시 홍콩으로 떠나던 11월 2일까지 12일 동안 계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